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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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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빈 장씨 . . . . 11회 일치
         서인 영수이자 [[송시열]]의 최측근인 [[김수항]], [[김수흥]]의 종손녀 김씨가 간택되어 3월 28일에 숙의로 봉해졌고 노비 150명이 하사되었다. 5월 27일에는 소의로 진봉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는데 회임은 고사하고 [[조선 숙종|숙종]]의 사랑도 받지 못한 김씨에게 이러한 특별진봉이 거듭된 것은 서인 영수의 종손녀라는 신분과 장씨를 향한 [[서인]]과 [[인현왕후]]의 견제를 의식한 [[조선 숙종|숙종]]의 방어책이었다.<ref group="주">김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은 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에 언급되어 있다.</ref>
         옥교 사건은 그때까지 장씨에 대한 [[서인]]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조선 숙종|숙종]]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같은 당하관의 아내인 귀인 김씨의 어미도 옥교를 타고 수시로 궁에 드나들지만 문제 삼아진 적이 없으며, 장씨의 생모는 후궁이 해산할 때 교자를 타고 입궁할 수 있다는 왕실 규례에 따라 [[조선 숙종|숙종]]의 어명을 받고 입궁한 것이며, 어명을 상징하는 선소동패(宣召銅牌)를 보였음에도 입궁치 못하고 내쫓긴 것은 왕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선포하며 [[이익수]] 및 사헌부 관원을 체포하여 엄형을 내리고 사형할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도 벌을 내릴 것을 선포했다. 하지만 [[조선 숙종|숙종]]의 척신이자 최측근이기도 했던 우의정 [[조사석]]마저 윤씨가 탄 가마가 8인교<ref group="주">옥교에는 2인교, 4인교, 6인교, 8인교 등이 있는데 이후 사치풍조가 만연해져서 12인교도 생겨났다. 임금과 왕후가 타는 가마는 연으로 20명이 들었고, 세자의 연은 16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공주와 옹주가 타는 덩은 8명이 든다. [[조사석]]은 윤씨가 공주와 옹주의 덩보다는 못하지만 8명이 드는 8인교를 탄 것은 부당하다고 고발한 것이다.</ref><ref>《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정연식 저</ref><ref group="주">사람이 드는 가마의 상급은 말이 끄는 가마인데 쌍교와 독교로 나뉜다. 말 두 마리가 앞뒤로 가마를 끄는 쌍교가 상급으로 2품 이상과 승지만이 탈 수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영조시대엔 이미 예사로와진 일이 되어 여인들도 쌍교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숙종시대에도 비슷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신생왕자의 외조모이자 왕명을 받고 입궐하던 윤씨가 8인교를 탄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행위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윤씨가 옥교를 탄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ref> 였음을 강조하며 [[영빈 김씨|귀인 김씨]]의 어미는 비교 대상이 아님<ref group="주">귀인 김씨의 어미는 당상관의 아내는 아니지만 판서였던 [[이정영]]의 딸이다. 또한 귀인 김씨의 종조부인 [[김수항]], [[김수흥]]이 정승이었기에 [[조사석]]은 귀인 김씨의 어미는 역관 가문 출신인 윤씨에 비해 옥교를 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ref> 을 주장함으로써 숙종은 서인 대신은 물론 윤씨를 모욕한 하리에게 내린 벌조차도 취소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했다.
         [[임해군]]의 동복 동생인 [[광해군]]은 큰 아들이 아니기에 당연히 원자가 아닌 신분으로 세자가 되었다. 후궁 소생이 원자가 될 자격이 없지는 않지만 서른이 되지 않은 [[조선 숙종|숙종]]이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급한 결정이었다.그러나, 부왕인 [[조선 현종|현종]]이 34세에 죽었고, 왕의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대였던 만큼, 30세가 다 되어가도록 후사가 없는 상황이 비정상적이었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다.</ref> 하고 있던 서인은 숙종의 선언에 당황했지만 제대로 반대를 하거나 저지를 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 속에 [[조선 숙종|숙종]]은 불과 닷새 후인 1월 15일에 왕자 윤에게 원자 명호를 내려 종묘 사직에 고했다. 또한, 숙종은 원자 윤의 생모 소의 장씨를 정1품 빈(嬪)으로 책봉하여 귀인 김씨를 제치고 후궁 1위로 만들었다.<ref group="주">숙종실록에는 15일에 빈으로 책봉된 것으로 기록됐지만 승정원일기에는 17일로 기록되어 있다.</ref> 앞서 [[조선 숙종|숙종]]이 원자 정호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관직을 내놓고 떠나라는 선언이 있었으며, 이미 종묘 사직에 고한 일을 무르라는 것은 선대 왕들을 한꺼번에 능멸하는 행위이자 신권이 왕권의 위에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나 다름없기에 [[서인]]은 소극적인 반박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밖에 없었고, 숙종은 이 또한 용서하지 않아 그들을 파직하였다.
         [[1689년]] 4월 21일, [[영빈 김씨|귀인 김씨]]가 [[조선 숙종|숙종]]이 빈청 인견의 공사를 적어놓은 종이를 훔쳐 소매에 숨긴 것이 발각되어 유배 중인 [[김수항]]에게 사형의 명이 내려지고, 22일 [[영빈 김씨|귀인 김씨]]의 작호가 삭탈되고 사제로 폐출되었다.
         다음날 23일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생일이었는데 [[조선 숙종|숙종]]이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의 국상기간 등을 이유로 탄일 하례 의식을 생략하라는 어명을 내렸지만 국모의 당연한 권한이라는 이유로 어명이 무시되고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하례가 올려졌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이 분노하여 [[인현왕후|중전]] 민씨와 크게 다투고, 조정 대신들에게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교사스럽고 간특한 부인'''으로 칭하며 평소의 언동<ref group="주">시부모([[조선 현종|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계시를 빙자하여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팔자라고 거짓을 고한 것, 원자가 탄생하자 노여워하며 주가(主家: 공주의 시가.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를 의미)와 급격히 친밀해지고 [[홍치상]]의 무죄방면을 종용한 것, 궁인들의 당파를 나눠 핍박한 것, 폐출되는 [[귀인 김씨]]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가마를 타지 말고 걸어서 빨리 궁에서 나가라고 재촉한 것 등</ref> 을 비난하며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국모로서 군림할 자격이 없으니 고사를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민씨를 폐서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이에 [[서인]] 대신 뿐만 아니라 [[남인]]조차 당황하여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 [[민암]] 등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올려진 '''탄일 문안은 신자(臣子)들의 상례'''이니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는 죄가 없음을 주장하며 강력히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변호하였고, [[권대운]]은 고사를 찾으라는 [[조선 숙종|숙종]]의 명에 불복하며 사직을 청하였다. 이러한 조정 안팎의 반발에 대해 [[조선 숙종|숙종]]은 [[서인]]은 처벌하고 [[남인]]은 용서하는 차별을 보임과 동시에, 24일에는 [[인현왕후|중전]] 민씨가 [[조선 숙종|숙종]]과 크게 말다툼을 하면서 그녀 자신의 입으로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는 과격한 언사들을 입에 담았던 사실을 폭로했다.
         애초,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후궁(희빈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의 집과 친분이 있어서 그 연줄로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라는 김만중의 발언이었는데, 숙종 15년(1689년) 2월, 김만중의 아들 김진화의 공초 내용인 "후궁(後宮)의 어미는 예전에 조 정승의 집과 같은 방(坊: 동네)에서 살았는데, 근일(近日)에는 발걸음을 끊고 왕래하지 않는다."<ref>숙종실록 숙종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2월 28일(병인) 3번째기사</ref> 는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 처갓집의 여종이었기에 조사석과 친분이 있었던게 아니라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친분이 있었던 것을 시사하며, 동시에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 처갓집의 여종이었다는 사실이 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더욱이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 장씨와의 연줄 덕이라는 소문을 배포한 자가 [[홍치상]]이었다는 점은 순수성에도 의혹을 제기하는데, [[홍치상]]은 장씨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영빈 김씨]](당시 귀인)의 이모부이기 때문이다.<ref group="주">[[홍치상]]의 첫아내는 [[영빈 김씨]]의 이모이다. [[홍치상]]의 아들인 [[홍태유]]는 아비를 구명하며 [[홍치상]]이 이모인 [[숙명공주]]에게서 소문을 얻은 것이라 주장하였는데, [[숙명공주]]의 아들인 [[심정보]] 또한 [[영빈 김씨]]의 이모부이다. [[영빈 김씨]]의 폐서인 사유는 궁내의 사정을 친정에 전달한 것과 주가(主家: 공·옹주를 의미)와 내통하여 분란을 일으킨 죄목이었으며, [[영빈 김씨]]는 [[인현왕후]]의 복위로 특별히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2차례나 홀로 승급에서 제외되는 등 [[조선 숙종|숙종]]의 외면을 받았다. [[기사환국]]때 교형을 당한 [[홍치상]] 또한 [[인현왕후]]의 복위로 특별히 복관되었지만 어머니인 [[숙안공주]]와 [[인현왕후]]가 모두 사망한 1702년에 다시 복관이 취소되고 국가 죄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조선 숙종|숙종]]은 이후에도 [[홍치상]]이 복관되지 않도록 다시금 엄명을 내릴 만큼 반감을 표명했다.</ref> [[홍치상]]이 계실의 지친인 [[이사명]]에게 소문을 전달했고, [[이사명]]이 사돈인 [[김만중]]에게 전달해 [[김만중]]이 [[조선 숙종|숙종]]에게 따진 것이 숙종실록 숙종 13년 6월 16일 기사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이다.
  • 하동부대부인 . . . . 9회 일치
         |이름 = 하동부대부인 정씨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 [[9월 23일]] - [[1567년]] [[6월 24일]])는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정인지]]의 후손이며 [[조선]] 제14대 [[선조]]의 사친이자 [[덕흥대원군]]의 부인이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자 [[덕흥군]]과 가례를 올려 군부인이 되었으며, [[1567년]] 셋째 아들 [[조선 선조|선조]] 즉위 직전에 사망하였다. 사후 임금의 사가 생모로서 '''하동부부인'''으로 추증됐으나 정의상의 오류로 인해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관은 [[하동 정씨|하동]](河東)이다.
         [[조선 명종|명종]] 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한 [[조선 선조|선조]]는 [[조선 예종|예종]]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다가 즉위 직후 스스로를 파양하고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조선 성종|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배경도 없었으며 생부 [[덕흥군]]이 후궁 소생 왕자에 불과하여 부모를 왕과 왕후로 격상할 수 없었다. 이에 절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작위가 공신 정1품의 작위로 왕비의 아버지의 작위로도 쓰여진 부원군(府院君)의 부(府)를 대(大)로 교체한 대원군(大院君)이다. [[조선 선조|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였고, 생모 군부인(郡夫人) 정씨는 외명부 소속 왕실 여성의 최고 품작인 부부인으로 추증하였다.
         {{인용문|중종 공희 대왕의 손자이며,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의 셋째 아드님이다. 어머니은 하동 부부인 정씨(河東府夫人鄭氏)로 증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이다.|《조선왕조실록》선조 총서}}
         {{인용문|옛적에 우리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기사년에 덕흥군을 추승하여 덕흥 대원군으로 하였고, 부인 정씨(鄭氏)를 봉하여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하였으며, 자손이 습직(襲職)하여 계속 대군(大君)의 예에 따랐습니다.|《조선왕조실록》인조 13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7월 27일(정유) 1번째기사}}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 [[조선 영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인데<ref>《조선왕조실록》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ref>, 사실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조선 경종|경종]]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조선 경종|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시초로 한다.<ref>《조선왕조실록》경종 9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7월 17일(경자) 1번째기사</ref>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하여 영조 즉위년에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진달하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조선 경종|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의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이후 정씨의 작위는 다시 본래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어 불리기도 하다가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으로 섞여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14년 때의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의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의거해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으로 짐작된다.<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B%E4%BA%BA&set_id=-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7%E5%A4%AB%E4%BA%BA&set_id=59642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E5%A4%A7%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insp_result_s.jsp?M=0&oflag=0&set_id=596427&selK=1&selT=1&query=%E5%A4%A7%E9%99%A2%E5%90%9B%E5%A4%AB%E4%BA%BA&query_Result=&sinfo=&list_per_page=10&chkID=0&opAll=0&opP=0&opA=0&opB=0&opR=0&opT=0&opG=0&opW=0&qAll=&qP=&qA=&qB=&qR=&qT=&qG=&qW=&idS=&idE=&tc=2&pc=2&cp=1&startpos=0&pos=0 대원군부인]</ref><ref>《조선왕조실록》영조 117권, 47년(1771 신묘 / 청 건륭(乾隆) 36년) 8월 9일(정축) 1번째기사 中 "그 사체에 있어서 창빈(昌嬪)·대원군(大院君)·하동 부인(河東夫人)을 대진한 후에 어떻게 합제(合祭)할 수 있겠는가?"</ref>
         [[분류:1522년 태어남]][[분류:1567년 죽음]][[분류:부대부인]][[분류:도정궁 주인]][[분류:운현궁]][[분류:덕흥대원군파]][[분류:하동 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 선조]]
  • 한명회 . . . . 7회 일치
         |배우자= [[신애라]] (정종화의 딸), 첩 전주 이씨(선천공조의 딸), 첩 연일 정씨(정종성의 서녀), 첩 이름 미상
         정실 부인 민씨와 여러 첩이 있었으나, 첩실의 존재는 네 명이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정종화(鄭宗和)의 딸 연일 정씨와 전주 이씨는 [[조선 세조|세조]]가 특별히 [[신애라]]에 봉작하였으므로, 이후 정식 부인으로 대우하게 되었다.
         * 측실: 연일 정씨, 정종화(鄭宗和)의 딸,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庶孫女)
         * 첩: 연일 정씨, [[정종성]](鄭宗誠)의 서녀, [[정보 (조선)|정보]]의 서매,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庶孫女)
         [[정몽주]]의 서손녀이며 [[정보 (조선)|정보]]의 서누이동생 정씨는 한명회의 소실이 되었다.<ref>선비(이용범, 바움, 2004) 참조</ref><ref>야사로 보는 조선의 역사(최범서, 가람기획, 2003) 참조</ref>
         후배 연일 정씨는 통의원사(通議院事) 정종화(鄭宗和)의 딸이며 포은(圃隱) [[정몽주]]의 손녀이니 그가 서북 양도의 관찰(西北兩道 觀察)사로 재직할 때 마음과 몸차림이 단엄한 것을 보고 함께 왔다. [[전주 이씨]] 선천공조의 딸은 아버지의 이름이 정확히 전하지 않는다. 그가 서백(西伯)이 되었을 때 이름 미상의 전주 이씨에게 사위 되기를 위협 받았는데 한명회가 승낙하지 않자, 그가 칼을 들고 사생결단하여 부득이 배필로 취하여 데려왔다.
         집안에서 상하를 막론하고 두 부인을 부인으로서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날 [[조선 세조|세조]]가 그의 집에 방문하니 정종화의 딸 정씨, 이씨가 모셔서 술을 나누니 왕이 누구인지 물으니 양 부인이 뜰에 엎드려 그 원통한 사실을 울면서 하소연하자 [[조선 세조|세조]]가 형수(兄嫂)라고 부르며 입시하도록 하여, 특별히 가져온 종이와 먹에 어필로써 직접 써서 교지를 전하고 양 부인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봉하는 옥새를 눌러주니 온 집안이 이때부터 양 부인을 괄시하지 않고 부인의 예로써 대했다.
  • 정재학 (1856년) . . . . 5회 일치
         27년 간 이어진 그의 은행경영 노하우는 아들과 손자에게 넘겨졌다. 숱한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계은행]] 자본의 총집결지였던 [[조흥은행]]에서 같은 가문의 한국인 행장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5대 [[정종원]] 행장과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에 오른 2대 [[정운용]] 행장이 각각 그의 3남이고 장손이다. [[정재학]]이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투입한 민족자본은 정씨 가문 지분으로 상속되면서 고스란히 [[조흥은행]]에 남겨졌다.<ref name="ReferenceC"><<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83~87</ref><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ref>서광운, <<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0) p.684 조흥은행 계보도</ref>
         [[정재학]]은 1858년 경북 경제권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연일(영일) 정씨 정석은과 손남산 사이의 1남 3녀 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외가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소년 시절에는 잠시 방황을 하기도 했으나 20세에 접어들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번듯한 인생을 일구겠노라 굳게 다짐한다. 그는 금전 대부업자였던 부자 밑에 들어간 뒤 어렵게 번 품삯을 한 푼 두 푼 모아갔다.
         최대주주 자리를 잃은 [[정재학]]은 1940년 4월2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ref>동아일보 1940년 4월 9일 4면 합은두취사거</ref> [[정재학]]의 장례식은 1940년 4월8일 거행됐다. 당시 20대의 자동차가 영구차를 뒸따랐다고 한다. 전국 각지의 부호들이 대거 영면을 빌기 위해 찾아들었다고 전해진다. [[고승제]] 박사는 " 당시 그의 영구차 행렬 가운데 '고통정대부연일정씨재학공지구 ( 故通政大夫 延日鄭氏在學公之柩 )란 [[영건]](靈巾)이 내걸렸고 이는 상민으로 태어난 정재학이 양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상징"이라고 평가했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70</ref>
         일본제국주의 통치 시절 정재학 행장의 27년 은행경영 노하우는 해방후 아들과 손자에게 이어졌다. 일제가 강요한 민족자본은행 간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계은행]] 자본의 총집결지였던 [[조흥은행]]에서 정재학 행장의 아들과 손자가 행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5대 [[정종원]] 행장과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에 오른 2대 [[정운용]] 행장이 각각 그의 3남이고 장손이다. [[정재학]]행장이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투입한 민족자본은 정씨 가문 지분으로 상속되면서 [[조흥은행]]지분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ref name="ReferenceC"/><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2003 )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정재학은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이었다. 1922년 경북 고아구제회를 설립, 운영자금을 부담했다. 고아수가 260명으로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정재학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거액의 재산보다 '어머니 없는 손자'들을 가진 것이 기쁘지 짝이 없는 일"이라고 주변에 널리 알렸다. 그러면서 고아들 전원에게 자신의 정씨 성을 붙여줬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70</ref> 또한 대구지역에서는 정재학에 대해 세 가지 재주를 겸비한 기인이란 평가가 돌았다고 한다. 우선 돈 버는 재주, 다음으로 아이 낳는 재주, 마지막으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호식 등이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22</ref>
  • 정종원 . . . . 5회 일치
         이로써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서 27년갖 은행장을 역임한 정재학은 3남 정종원, 장손 정운용을 조흥은행장으로 배출하게 됐다. 3대에 걸쳐 은행장을 낸 사례는 [[정재학]] 가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대한 정씨 가문의 지분은 조흥은행 출범 당시 조흥은행 주식으로 변경됐다. 정종원과 정운용은 조흥은행 대주주로 남게 됐다.
         대구은행 설립자 정재학의 후손인 정종원(3남)과 [[정운용]](맏손자)은 1957년 무렵 조흥은행의 주도권을 두고 동일은행계의 대주주였던 조선황실 외척인 민 씨 가문과 맞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흥은행은 일제 말 동일은행과 경상합동은행을 흡수한 한성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은행이다. 따라서 양대 대주주인 [[경상합동은행]](전 [[대구은행]])계 정씨 집안과 동일은행계 민 씨 집안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관심사였다.
         이병철은 정재학의 3남이자 조흥은행장인 정종원과 다각도로 교류하고 있었고 언론을 통해 정씨 가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ref>동아일보 1957년 6월20일 1면 이병철씨 조은주 양도 거부</ref><ref>동아일보 1957년 7월21일 3면 은행주 불하 경위와 금후 문제점</ref> 이병철은 1956~1957년 진행된 은행 [[귀속주]] 불하과정에서 민 씨가문과 정씨가문 간 지분경쟁에서 정씨측에 힘을 실어줬다.
  • 폐비 윤씨 . . . . 5회 일치
         당시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비(廢妃)가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반성하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귀인 엄씨|숙의 엄씨]]와 [[귀인 정씨 (성종)|귀인 정씨]]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였다.
  • 화완옹주 . . . . 5회 일치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친동생이었으나 그의 정적이었고, [[조선 정조|정조]] 즉위 후, 옹주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정씨의 처라는 뜻의 정처로 불렸다. 고종 때 가서야 복권되었다.
         ** 서어머니 : [[귀인 조씨 (영조)|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 10 16~1780 10 05)
         '''시가 [[연일 정씨]](延日 鄭氏)'''
         *** 장녀 : 정씨(鄭氏) (1756년 8월 3일~ 1757년 1월 23일) - 조졸
  • 전성군 (1488년) . . . . 4회 일치
         [[1527년]](중종 22) [[7월]] [[함열읍|함열]][[현감]](咸悅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면직되었다. 이후 좌익찬(左翊贊), [[사복시]]주부, 겸[[한성부]][[참군]](兼漢城府參軍), [[장예원|장예]][[사평]](掌隷司評), [[종부시]]주부를 거쳐 다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부정(副正) 이공장(李公檣)의 천거를 받았다가 [[사헌부]]로부터 성품이 본래 침착하지 못하고 소행도 탐욕스럽고 간특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ref>중종실록 94권, 1541년(중종 36년, 명 가정 20년) 2월 17일 갑술 1번째기사, "헌부가 천거하는 자들이 사적으로 천거를 함으로 폐단이 심하다고 아뢰다"</ref>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정종보(鄭宗輔)의 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8남 1녀를 두었는데, 일곱째 아들이 권신 [[이량 (조선)|이량]]이고, 고명딸은 [[청송 심씨]] [[의정부]][[영의정]][[심연원]]의 아들이자 [[좌의정]] [[심통원]]의 조카 [[심강]]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왕릉골(현,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왕릉골 부락) 좌산 경좌에 부인 동래정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아버지 여양군, 조부 율원군의 묘소 아래에 있다.
         * 조모 : 무안현부인 [[동래 정씨]](務安縣夫人 東萊鄭氏)
         * 부인 : 동래 정씨(? ~ [[1557년]] [[1월 9일]]), 내자시정 [[정종보]](鄭宗輔)의 딸
  • 정인숙 (1945년) . . . . 4회 일치
         유진산 당수를 시작으로 [[조윤형]], [[김상현]] 등의 야당 의원들은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소문을 전달하고 그 의혹을 추궁했다. 조윤형 의원은 [[5월 15일]] 정일권과 정인숙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본회의장에서 공개했고,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수사에서 불거진 의혹을 밝히라고 요구했다.<ref name="kim100">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0페이지</ref> 조 의원은 이어 경찰이 정 여인 주변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경찰은 오빠 정씨가 정 여인 재산을 노리고 열등감에서 살해했다고 하지만 재산 자체가 정 여인 명의로 돼 있어 상속할 수<ref name="kim100"/> 도 없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조윤형 의원은 또 이 사건에 청부살인의 혐의가 없는가, 검찰이 [[3월 22일]] 밤까지 철야 신문하면서 복도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변호사]]를 접근조차 못하게 해서 정씨를 범인으로 자백케 한 것은 아닌가, 정종욱이 병원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수 없고 모 인사를 불러달라고 한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물었다.<ref name="kim101">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1페이지</ref><ref>여영무, <추척 정인숙 미스터리>, 신동아 1983년 9월호(동아일보사, 1983) 171</ref> [[조윤형]] 의원에 이어 [[신민당]]의 [[김상현]]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과 정인숙이 관계했을지도 모른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ref name="kim101"/>
         정성일은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책에서 [[1991년]] [[11월]] [[미국]]에서 [[정일권]]과 대화를 나눈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문을 사이에 두고 한 대화에서 정일권은 정성일에게 "아가야, 나는..... 나는 지금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하고 다시 와주련?"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ref name="kum108">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8페이지</ref> 그러나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한 정성일은 "최근 정씨(정일권)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말해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ref name="kum108"/>
         [[정성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정 전 총리와 만나지는 못했지만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눈물의 부자상봉을 했으며, 외삼촌 등의 만류로 친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 소 취하를 스스로 했다’고 밝혔을 뿐 금전적 요구나 지원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었다.<ref name="ilyo01"/> [[정종욱]]은 소송 취하 배경에 대해“조카 정씨가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했다”며 “그를 살려야 가족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소송을 취하했다”고 말한 바 있다.<ref name="ilsa01"/> 소송 취하 배경에 대해 [[2007년]] [[4월]]의 교포사회 한 언론은 보도에서 “정 씨와 사귀던 한 여인이 ‘정 씨가 91년 친자확인소송 취하로 80만 달러를 생부에게 받았다는 것만 들었다’고 전화인터뷰에서 밝혔다”는 진술을 인용해 보도했다.<ref name="ilsa01"/>
  • 정난정 . . . . 3회 일치
         본관은 [[초계 정씨|초계]](草溪)로 아버지는 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이고, 정난정은 그와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다. [[한성부]] 출신.
         [[한성부]]에서 [[초계 정씨]] [[오위도총부]] 부총관 [[정윤겸]]과 차실(次室) 남씨(南氏)의 2남 3녀 중에서 막내 딸로 태어났다. 모친은 본래는 상민이 아니었으나 난신에 연좌된 부녀로서 노비가 되었고, [[정윤겸]]의 집에 분배되었다. 그는 정윤겸과 노비가 된 반가 여성 사이에서 서녀(庶女)의 신분으로 태어났다.<ref>그러나 그 모친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ref> 그리고 정난정은 어릴 때 집을 나와 기생이 되었다.
         [[분류:생년 미상]][[분류:156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윤원형]][[분류:음독 자살한 사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불교 신자]][[분류:초계 정씨]]
  • 정운용 . . . . 3회 일치
         정운용은 조부인 [[정재학]] 대구은행장, 경상합동은행장 그리고 삼촌인 [[정종원]] 조흥은행장과 더불어 3대에 걸친 정씨 가문 은행장 배출이란 진기록을 남겼다. 정씨 가문의 3명 행장 재임기간을 합치면 34년에 이른다.
         대구은행 설립자 정재학의 후손인 [[정종원]](3남)과 정운용(장손)은 1957년 무렵 조흥은행의 주도권을 두고 동일은행계의 대주주였던 조선황실 외척인 민씨가문과 맞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흥은행은 일제 말 동일은행과 경상합동은행을 흡수한 한성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은행이다. 따라서 양대 대주주인 [[경상합동은행]] - [[대구은행]])계 정씨 집안과 동일은행계 민씨 집안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관심사였다.
  • 정호용 . . . . 3회 일치
         |본관 = [[연일 정씨]]
         이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후보자였던 [[김영삼]]의 지지 유세를 하였습니 그러나 1995년에는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12.12 군사 반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자로서 1997년 4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내란 중요임무 종사로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면됐다. 본관은 [[연일 정씨|연일]](延日)으로 호는 목우(牧牛)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민주정의당]][[분류:박정희]][[분류:노태우]][[분류:김영삼]][[분류:하나회]][[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남산초등학교 동문]][[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고급부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건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연일 정씨]][[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
  • 이인 . . . . 2회 일치
         이인은 [[1896년]] [[10월 26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사일동(射一洞)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 이관준은 영남의 명망가이자 [[성리학]]자였고, 삼촌 [[이시영 (1882년)|이시영]]은 독립운동가로 순국하였다. 아버지 이종영은 [[대한제국]] 당시 애국 계몽운동단체인 [[자강회]](自彊會)와 [[대한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계몽운동가였다.
         ** 어머니 :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
  • 임수정(탤런트) . . . . 2회 일치
         > 수정씨를 보면서 늘 묘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얼굴은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생겼거든요. 그런데 '…ing' 같은 영화를 보면 말과 행동이나 이런 것을, 일상적인 것을 너무 잘 담아내잖아요. 얼굴이 주는 다른 세상의 느낌과 연기의 너무나도 자연스런 느낌이 충돌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 (수정씨한테 바라는 점을 묻는 질문에) 잘먹고, 운동도 열심히하고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 장재인 . . . . 2회 일치
         별명은 신데렐라(혹은 장데렐라), 초식공룡, 귀인, 지리산 거북이, 장띠방. 탑4중에서는 제일 늦게 갤러리가 생성되었다.[[http://gall.dcinside.com/list.php?id=jji|#]]최근에는 갤러리에 인증글을 쓰기도 했다.[[http://gall.dcinside.com/list.php?id=jji&no=62047&page=1&bbs=|#]]
         첫 사전투표 결과, 장재인이 2위 김지수하고도 많은 표차로 첫 사전투표 1위를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첫 번째 생방미션인 ''' '리메이크 미션' '''에선 '''남진의 님과함께'''를 색다르게 소화하여 93(승), 98(엄), 97(윤)의 점수를 받고 '''첫 슈퍼세이브'''의 영광을 안았다. 윤종신의 '좋은 가수가 될 것 같습니다'라는 발언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방송이 끝난 후, 윤건이 '귀인 장재인, 넌 소름이였어.'라고 트위터에 쓴 글도 화제를 낳았다. 장재인 내정설이 슬슬 나돌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
  • 정기선 . . . . 2회 일치
          | 본관 = [[하동 정씨|하동]](河東)
         [[분류:1982년 태어남]][[분류:하동 정씨]][[분류:정주영]][[분류:현대가]][[분류:현대 그룹]][[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일외국어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경영대학 동문]][[분류:스탠퍼드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
  • 정도복 (고려) . . . . 2회 일치
         '''정도복'''(鄭道復)은 [[고려]]시대 말기,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선, 상시 등을 지내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밀직제학, 한성부우윤,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으며 형 [[정도전]]이 암살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성주 유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뒤 인녕부사윤에 이르렀다. 본관은 [[봉화 정씨|봉화]](奉化)이고 자(字)는 내지(來之)이고 호(號)는 일봉(逸峯)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며, [[정도전]](鄭道傳)의 친 아우이다.
         [[분류:봉화 정씨]][[분류:조선의 공신]][[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정명훈 (지휘자) . . . . 2회 일치
         '''정명훈'''(鄭明勳, [[1953년]] [[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본관은 [[하동 정씨|하동]]이다.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동생이다. [[종교]]는 [[개신교]]다.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하동 정씨]][[분류:대한민국의 지휘자]][[분류:대한민국의 고전 피아노 연주자]][[분류:산타 체칠리아 음악원]][[분류:줄리아드 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수상자]][[분류: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 수훈자]]
  • 정몽규 . . . . 2회 일치
         | 본관 = [[하동 정씨|하동]]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하동 정씨]][[분류:현대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용산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옥스퍼드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HDC그룹]][[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
  • 정몽근 . . . . 2회 일치
         |본관 = [[하동 정씨|하동]]
         [[분류:194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하동 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현대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정주영]][[분류:경복고등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현대백화점그룹]]
  • 정몽원 . . . . 2회 일치
         |본관= [[하동 정씨|하동]]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동 정씨]][[분류:현대가]][[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동문]]
  • 정몽헌 . . . . 2회 일치
         |본관 = [[하동 정씨|하동]]
         [[분류:1948년 태어남]][[분류:2003년 죽음]][[분류:하동 정씨]][[분류:현대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보성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자살한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사람]][[분류:투신자살한 사람]]
  • 정선 (화가) . . . . 2회 일치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정씨|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1138&pTotalSearchCount=3&pPosition=2&pRecordId=PPL_6JOc_A1676_1_0012083&pName=정선(鄭歚){3}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 정선]</ref>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분류:정선| ]][[분류:1676년 태어남]][[분류:1759년 죽음]][[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광주 정씨]][[분류:18세기 화가]]
  • 정재호 (1930년) . . . . 2회 일치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이다.
         [[분류:193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동래 정씨]][[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정차온 . . . . 2회 일치
         '''정차온'''(鄭次溫, [[1399년]](정종 1) ~ ?)은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 정씨|경주]]이고 자(字)는 공후(孔厚)이다. [[경상북도]] 출신.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경주 정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정형돈 . . . . 2회 일치
         '''정형돈'''([[1978년]] [[2월 7일]]<ref>[https://entertain.v.daum.net/v/20160730070104091 정형돈,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시기"]</ref><ref>[https://www.fncent.com/JHD/b/introduce/10713 음력 1978년 2월 7일, 양력 1978년 3월 15일]</ref> ~ )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희극인]], [[사회자]]이다.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
         [[분류:개그콘서트]][[분류:1994년 데뷔]][[분류:MBC 방송연예대상 대상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희극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학력 위조 의혹 피해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김천시 출신]][[분류:197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동래 정씨]][[분류:FNC 엔터테인먼트 소속]]
  • 효령대군 . . . . 2회 일치
         그는 10세 시절이던 [[1405년]] '''효령군'''에 책봉되었으며 12세 시절이던 [[1407년]]에 해주 정씨 부인(정역의 딸)과를 가례를 치렀고 17세 시절이던 [[1412년]]에 '''효령대군'''에 진책되었다. [[1417년]] 자신의 [[호 (이름)|아호(雅號)]]이기도 한 '''연강'''(蓮江)이라는 [[법명|법명(法名)]]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활쏘기에 능숙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 정부인 :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藝城府夫人 海州 鄭氏, 1394~1470)
  • 흥인군 . . . . 2회 일치
         |배우자= 정경부인 안동 권씨(초취) <br/> 정경부인 연일 정씨(재취) <br/> 정경부인 안동 김씨(삼취)
         ** 부인 : 군부인 증정경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 [[1831년]] [[3월 29일]] - [[1852년]] [[3월 9일]]), [[현감]] 정명원(鄭明源)의 딸
  • 흥친왕 . . . . 2회 일치
         * [[귀인 이씨]]
         * [[귀인 장씨]]
  • 규성 진씨 . . . . 1회 일치
         제나라의 왕이었기 때문에 전씨 왕족 가운데 는 제나라에서 왕씨(王氏)로 불리게 된다. 원성 왕씨 후손 [[왕망]]은 [[선양]]을 받아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건국하였다.--제나라의 복수다 한나라!--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한 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요씨(姚氏), 일부는 정씨(丁氏)로 성씨를 바꾸게 된다.
  • 도게자 . . . . 1회 일치
         본래 고대로부터 일본에서 귀인이 통행할 때,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인사를 했는데 여기에서 도게자가 유례하였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도 기록될 정도로 오래된 풍속이었다. [[다이카 개신]]에서 궤례를 폐지하고 중국식 입례를 도입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도노 . . . . 1회 일치
         주로 중세 일본에서 [[영주]] 급의 [[귀인]]에 대하여 부르는 높임말. 인명이나 신분에 붙여서 "-님" 정도의 수식어로도 쓰인다.
  • 산킨고타이 . . . . 1회 일치
         이전부터 사무라이들은 일종의 군역으로서, 중앙에 상경하여 귀인을 호위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교토대번역(京都大番役)이라고 하여 지방무사들이 교토에 상경하여 호위를 맡는 관습이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대번역(鎌倉大番役)이라고 하여 가마쿠라에도 상경하도록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가마쿠라 시대의 무가법률)에 지정되어 있었으며, 교토에 상경하여 호위하는 임무도 무사들마다 균등하게 분배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일본에서 어느 정도 통일 세력이 나타날 때마다 반복되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서도 오사카에 각 영주들을 상경하여 주둔하고 가족을 인질로 두게 만들었다.
  • 소벌도리 . . . . 1회 일치
         [[일연]]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와 돌산고허촌의 촌장이 되었다고 한다.<ref name="연합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447848 <덕천리 유적과 돌산 고허촌과 소벌도리> ::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기원전 69년]]에 6부의 촌장들이 모여 덕(德)이 있는 자를 찾아 왕으로 삼고 수도를 정해 나라를 열 것을 결의하였는데 나정(蘿井)에서 이상한 기운이 비치는 것을 보고 찾아가서 붉은 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박혁거세]]이며,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옹립하여 [[신라|사로국]]을 건국하였다. 《[[삼국사기]]》는 나정에서 알과 혁거세를 처음 발견하여 양육한 것이 소벌공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허촌은 [[신라 유리왕|유리왕]] 때 사량부(沙梁部)로 개칭되고 최씨(崔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정씨(鄭氏)의 조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유카타 . . . . 1회 일치
         본래 [[가마쿠라 시대]]에 귀인이 증기욕을 할 때 입었던 삼(麻)으로 만든 유카타비라(湯帷子)라는 옷의 이름을 줄여서 '유카타'라고 한 것이 기원이다. 카타비라(かたびら)는 「겹옷의 한쪽면(袷の片ひら,아와세노 카타히라)」라는 뜻으로서, 안감을 붙이지 않은 홀옷을 뜻한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봉오도리]](盆踊り)가 성행하면서, 유카타가 민간에 퍼지게 되었다.
  • 이소선 . . . . 1회 일치
         * 1934년 경 어머니 김분이씨, 성서면 박곡동 박서면의 정씨마을로 개가 함.
  • 장인한 . . . . 1회 일치
         ** 《[[하면 된다]]》: 정씨 종친회 사무장 역
  • 전태일 . . . . 1회 일치
         그에게는 성이 다른 이모와 외삼촌이 있는데, 이는 그의 외할아버지 이성조는 어머니 [[이소선]]이 4살 때 사망, 외할머니는 정씨 남자와 재혼하였다.
  • 정광운 . . . . 1회 일치
         [[분류:서울응암초등학교 동문]][[분류:영남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성남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홍익대학교 동문]][[분류:동래 정씨]]
  • 정근모 . . . . 1회 일치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물리학자]][[분류: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분류:대한민국의 과학기술처 장관]][[분류:한국과학기술원]][[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미래희망연대]][[분류:친박]][[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명지대학교]][[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동문]][[분류:미시간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동래 정씨]][[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
  • 정대선 (기업인) . . . . 1회 일치
         [[분류:197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정주영]][[분류:하동 정씨]][[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정동기 . . . . 1회 일치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중위]][[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고등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실 수석비서관]][[분류:경동고등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전주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원광대학교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동 정씨]]
  • 정명재 . . . . 1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하동 정씨]][[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희극인]][[분류:1979년 데뷔]][[분류:195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성동고등학교 동문]]
  • 정찬성 . . . . 1회 일치
         ||<#000002> '''{{{#white 본관}}}'''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 정충원 . . . . 1회 일치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연일 정씨]]
  • 정환덕 . . . . 1회 일치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연일 정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태종무열왕 . . . . 1회 일치
         귀국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3품 이상의 관인들을 불러 송별연을 열었고, 『온탕비(溫湯碑)』 · 『진사비(晉祠碑)』의 글과 《[[진서]](晉書)》 한 질을 김춘추에게 하사하였으며 [[장안|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까지 나아가 전송하였다. 앞의 서적들은 태종 자신이 직접 짓고 글씨도 쓴 것으로, 특히 《진서》는 당의 [[비서감]](秘書監)에서 맨 먼저 필사한 두 질 가운데 하나로서 태자(훗날의 [[당 고종]])와 김춘추에게 각각 내린 것이었다. 김춘추도 당으로부터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의 벼슬을 받은 아들 문왕을 숙위(宿衛)로서 당에 남겨두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김춘추는 [[서해]]상에서 고구려 순라병에게 포착되어 나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함께 왔던 [[온군해]](溫君解)가 귀인의 관을 쓰고 배에 남아 고구려군의 주의를 끄는 사이 작은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f name="신라-648">《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2년(648)</ref><ref>[[최치원]],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ref>
  • 하이큐/233화 . . . . 1회 일치
          츠바키하라 측에선 이들이 시라토리자와를 꺾고 올라왔다고 긴장하고 있는데 주장인 [[에치고 사키에]]는 "시라토리자와랑 붙는게 나았겠냐"고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렇다고 하는 선수는 없다. 에치고는 경기 내용상 저들이 시라토리자와를 압도한 것도 아니며 세상엔 "우연"이란 것도 존재한다고 분위기를 바꾼다. 마루야마는 좀 팔랑귀인지 그런 설명을 듣고 나자 "우시와카랑 안 붙게 돼서 럭키"라고 태세전환한다. 사실 주장인 에치고는 "이긴건 이긴 것"이니 만큼 카라스노의 실력을 얕보지 않는다. 단지 "작년의 반복"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격려한 것이다.
  • 해양군 . . . . 1회 일치
          | 배우자 = 정부인 [[순흥 안씨]] <br /> 계부인 [[광산 정씨]] <br /> 제2계부인 [[한산 이씨]] <br /> 제3계부인 [[덕수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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